1998 황영동 사건|5명의 목숨을 앗아간 38일의 기록

1998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습니다. 특수강간 혐의로 구속됐다가 구속 집행정지로 풀려난 황영동(1949년생)이 대전 일대에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연쇄살인을 저질렀습니다. 특히 그를 검거한 것은 경찰이 아닌, 부상을 무릅쓰고 맞서 싸운 시민들이었습니다.

 

황영동, 전과 14범의 어두운 과거

황영동 검거 당시

황영동은 1972년 군 복무 중 탈영해 3년간 복역한 전력을 시작으로, 이후 강도상해, 강간 등 강력 범죄를 반복하며 19년 동안 교도소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거나 안정된 삶을 살 기회를 갖지 못했고, 학력도 낮았으며 일정한 직업이나 거주지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서울역과 갱생 보호소를 오가던 그는 결국 또다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1998년 7월 15일, 황영동은 특수강간 혐의로 수원 중부경찰서에 구속되어 검찰로 송치됐습니다. 그러나 녹내장 진단을 받은 뒤 8월 13일 구속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풀려났습니다. 당시 구속 집행정지에는 보호관찰 등 관리·감독이 필수적이었지만, 황영동에게는 어떠한 재범 방지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대전 일대에서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9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진 대전 일대 연쇄살인

황영동 사건 일지

1998년 9월부터 10월까지, 황영동은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혼자 있는 여성이었고, 황영동은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그의 범행은 매우 계획적이지는 않았지만,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잔인하게 범죄를 실행하는 형태였습니다. 이 시기에 대전 지역에서 발생한 부녀자 대상 강력 사건들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시민들의 불안감도 극에 달했습니다.

 

10월 23일, 황영동은 다시 수원으로 올라왔습니다. 수원 장안구 신풍동의 공중화장실에서 무용 강사 심 씨(46)를 칼로 위협하며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습니다. 이때 범행을 목격한 시민들은 전통 한옥을 보수 공사하던 인부들이었습니다.

 

인부들은 황영동이 휘두르는 흉기를 무릅쓰고 그와 격투를 벌였습니다. 23세 아르바이트생 안 씨는 싸움 도중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지만,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MBC 보도에 따르면, 시민들은 삽으로 황영동의 손을 내리쳐 칼을 떨어뜨리고, 그의 목을 끌어당겨 내동댕이치며 완전히 제압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시민들이 황영동을 완전히 제압한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결국 수원중부경찰서는 황영동을 강간미수 혐의로 긴급 체포했습니다.

 

경찰 수사와 연쇄살인의 전모

황영동이 체포된 이후, 수원중부경찰서는 강간미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추가 보강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 도중 황영동은 대전 일대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습니다. 이에 따라 황영동은 대전동부경찰서로 압송되었고, 연쇄살인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특히 연쇄살인범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싸운 대학생 안 씨에게는 수원중부경찰서장이 직접 찾아가 '용감한 시민상'과 소정의 포상금이 전달되었습니다.

 

재판과 판결

당시 언론 보도에서는 황영동이 5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3명을 살해한 혐의로만 기소되었습니다. 나머지 2건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1심 재판부는 황영동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2심에서 판결이 뒤집혔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녹내장 악화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해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점 등이 감안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결국 황영동은 대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습니다.

 

황영동 사건은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첫째, 구속 집행정지 제도의 허점입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을 풀어줄 경우, 보호관찰 등 엄격한 관리가 동반되어야 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절차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대규모 연쇄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둘째, 시민의 용기와 공공의식입니다. 경찰보다 앞서 범인을 제압한 것은 시민들이었습니다. 특히 부상을 무릅쓰고 범죄자와 맞선 인부들과 청년 안 씨의 용기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셋째, 사법부의 고민입니다. 극악한 범죄자에게 사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결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법부는 피고인의 건강 악화, 재범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론

황영동 사건은 단순히 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속 집행정지 제도의 허점, 사회적 관리 시스템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시민들이 발휘한 용기와 공공의식까지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범죄 예방은 단순히 제도 개선뿐만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용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