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29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당시 9살이었던 이형호군이 실종되었습니다. 이후 44일간 이어진 협박 전화와 현금 인출 시도, 그리고 수많은 수사 과정 끝에 이형호군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이 사건은 끝내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습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으로 꼽히며, 이후 여러 차례 방송과 언론을 통해 재조명되었습니다.
사건 개요
피해자인 이형호 군은 개포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형과 함께 등하교를 하던 중이었는데, 사건 당일에는 형보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혼자 귀가하던 중 실종되었습니다. 부모는 형호 군이 약속된 시간에 귀가하지 않자 곧바로 경찰에 실종 신고를 접수했고, 경찰은 실종아동 수사 체계에 따라 수색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범인의 협박 전화가 가족에게 걸려오면서 사건은 곧 유괴로 전환되었습니다. 범인은 피해자의 부모에게 몸값으로 2천만 원을 요구했고, 공중전화를 통해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하며 경찰의 추적을 회피했습니다. 경찰은 공중전화 위치 추적, 주변 CCTV 분석, 잠복 수사 등을 통해 범인을 검거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1. 협박 전화의 수법과 경찰 대응
범인은 협박 전화를 오직 공중전화만을 이용해 걸어왔고, 매 통화 시마다 장소를 바꿔 수사망을 피했습니다. 주로 서울 동대입구, 충무로, 압구정 일대의 공중전화가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아파트 단지 내부에 설치된 공중전화까지 활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범인은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몸값 전달 지시를 내리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협박을 가했는데요. 이는 피해자의 생존 가능성을 믿게 만들며 가족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였습니다. 경찰은 피해자의 가족과 함께 현금 전달 장소에 잠복 수사를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범인은 돈 회수 시 항상 차량을 정차하지 않거나, 접근 방식이 비정상적이어서 결국 검거에 실패했습니다. 당시는 공중전화 추적 기술이나 실시간 통신 위치 분석 기법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수사 기술적 한계 역시 명확했습니다.
1월 29일
- 범인이 협박 전화를 처음 걸어옴.
- 경찰 신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전화를 걸어 자신을 "서초경찰서 형사"라고 속이며 연기.
- 이형호 군의 의붓어머니는 이미 강남경찰서에 신고해 형사들이 집에 출동한 상태.
- 의붓어머니는 강남서 형사의 유도로 위기를 넘김.
1월 31일
- 범인, 이형호의 아버지 이우실에게 다시 접촉. 카폰을 통해 지시 전달.
- 김포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돈을 두고 가게 함. 그러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음.
- 밤에 전화해 "뒷좌석에 누가 타고 있었다"며 변명. 실제로는 형사들이 트렁크에 잠복 중이었음.
같은 날 밤
- 충무로역 공중전화로 이우실에게 다시 연락.
- 대한극장 앞, 태극당 제과점으로 이동 지시 → 폐점 상태라 다른 장소로 계속 이동하게 함.
- 동시에 집에도 전화, 경찰 개입 여부에 대해 의붓어머니를 추궁.
- 의붓어머니가 결국 경찰 개입 사실을 일부 인정.
2월 4일 (유괴 7일째)
- 범인, 직접 수령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계좌이체 방식으로 돈을 요구.
- 한일은행(윤정수 명의)과 상업은행(김주선 명의)에 계좌 개설.
- 무인 포스트 방식으로 메모 전달 → 마지막 메모에 계좌번호와 입금 요청.
- 요구금: 각 은행에 2천만원씩 총 4천만원 → 이우실은 한일은행에만 입금.
2월 13일
- 범인, 다시 협박 전화: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없군요. 형호가 죽기를 바라죠?"
- 88도로 서울교 아래 철제박스에 마지막 메모를 두었다고 통보.
- 이우실은 가짜 돈을 철제박스에 두고 떠남 → 형사들이 잠복.
- 그러나 박스 위치 혼동으로 범인 검거 실패.
- 범인은 가짜 돈 확인 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은 감사"라며 연락 끊음.
2월 19일
- 이우실, 입금된 돈을 상업은행 계좌로 이체.
- 상업은행 상계동지점에 한 남성이 돈 인출 시도.
- 은행원이 사고신고 계좌임을 인지하고 의심 → 남성은 통장을 낚아채 도주.
- 해당 지점에 CCTV가 없어 신원 확인 불가.
- 지문 등 증거도 없어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음.
범인은 1월 29일부터 총 44일간 60여 차례에 걸쳐 협박 전화를 했습니다. 목소리는 일정했으며, 상대가 경찰에 신고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형사 행세를 하며 확인 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범인은 무인 포스트 방식으로 돈을 요구했는데, 쓰레기통, 전봇대, 버스정류장 등 다양한 장소에 메모지를 남기고 이를 따라 이동하게 하며 결국 은행 계좌 입금을 요구했습니다.
2월 19일 상업은행 상계동지점에서 한 남성이 인출을 시도하다가 은행원의 의심으로 실패하고 달아났습니다. 해당 지점에는 CCTV가 없었고, 통장과 메모지에 지문이 남아있지 않아 수사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2. 시신 발견과 부검 결과
1991년 3월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 88도로 뚝방 고수부지 배수구에서 이형호군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신은 손발이 결박되어 있었고, 눈, 코, 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었으며, 외상 흔적도 있었습니다. 부검 결과 코와 입을 막은 테이프에 의해 질식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위 내용물은 잡곡밥과 나물이었으며, 이는 유괴 당일 친구 집에서 먹은 음식으로 사망 시점은 실종 당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는 범인이 애초부터 이형호군을 살려둘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였습니다.
3. 수사 경과와 공소시효 만료
사건 발생 이후 경찰은 서울 일대 공중전화 지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습니다. 협박 전화의 발신 위치, 피해자 주변 인물 탐문, 정황 수사, 프로파일링 등을 통해 용의자를 좁히려 했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당시 수사 방식은 현재처럼 DNA나 통신 위치 추적 기술에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박 전화의 목소리 성문 분석이 핵심 근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성문 분석만으로는 용의자 특정에 한계가 있었고, 일부 유력 용의자가 있었지만 물리적 증거가 부족해 기소되지 못했습니다. 수사기관은 여러 해에 걸쳐 사건을 재분석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2006년 1월 28일을 기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법적 수사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며, 이후 발생한 유사 사건의 참고 사례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용의자에 대한 여러 의혹
1. 목소리 분석과 용의자 이상재
사건 초기에 범인의 목소리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성문 분석을 진행한 결과, 이형호군의 생모 쪽 사촌동생 이상재와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이상재는 당시 무직 상태로 금전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이형호군의 가정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이상재는 전기통신을 전공한 경력이 있어 공중전화 시스템을 이용한 우회통화 등의 기술적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범행 당시 경상북도 경주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제출했고, 고속도로 통행권 및 숙박 기록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2.《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한 의혹 제기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형호군 사건을 여러 차례 다뤘습니다. 1992년 첫 방송에서는 성문 분석을 바탕으로 범인이 1명이라고 했으나, 양화대교 철제 박스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1명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올림픽대로 특성상 차량을 세우기 어려운 구조인데도 돈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공범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2001년 재방송에서는 성문 분석 결과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 밝혀졌고, 범인이 2명 이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3. 협박 전화의 특성과 공범 가능성
2011년 방송에서는 전화를 담당한 인물 외에도 최소 3명 이상의 공범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주범은 직접 전화를 하지 않고, 다른 인물을 시켜 전화를 걸게 했다는 점에서 주범은 이형호군과 면식이 있었고, 음성으로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목소리 분석을 통해 전화를 담당한 인물의 하관 구조와 몽타주 속 인물의 외형이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으며, 이는 서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수사상 문제점과 경찰의 실책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수차례 범인을 검거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양화대교 철제 박스 인근 잠복 중 무전 혼선으로 인해 범인을 놓쳤으며, 교보빌딩 인근에서 의심 인물을 식별하고도 주저하다가 범인을 놓친 사례도 있었습니다. 또한 한일은행에서 돈이 인출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대비책이 미흡했고, 해당 상황에 대한 대응이 미진했습니다. 초동 수사에서도 주변인물에 대한 탐문이 미흡했으며, 성문 분석 결과에만 지나치게 의존해 수사 방향이 좁아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협박 전화는 압구정동 인근 2km 내의 공중전화에서 자주 걸려왔으며, 형호군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전화가 걸려온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범인이 해당 지역의 지리에 밝고, 공중전화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인물임을 시사합니다. 당시 수사 관계자들 역시 협박 전화 담당은 형호군의 주변에 거주하거나 근무하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관련 탐문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정적인 실마리를 놓쳤습니다.
일본 글리코·모리나가 사건과의 유사성
이형호군 사건은 일본의 글리코·모리나가 유괴 협박 사건과 범행 수법에서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무인 포스트 방식과 전화 지시, 공범 가능성 등의 유사점이 있으며, 이형호군 사건의 범인이 해당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다만, 이는 확정된 사실은 아니며 추정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결론과 남은 의문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은 철저하게 계획된 범행이었으며, 단독범이 아닌 조직적인 범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 확보 실패와 수사 미비, 공소시효의 종료로 인해 이 사건은 영원한 미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형호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